2·8 독립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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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8 독립 선언은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유학 중이던 한국인 학생들이 발표한 독립 선언이다. 일제강점기, 민족자결주의의 영향, 고종의 사망 등이 배경이 되었으며, 이광수가 기초하고 최팔용이 낭독한 선언서를 통해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했다. 이 사건은 3·1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2023년에는 선언문의 영어 원본 필사본이 발견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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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수 - 독립신문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립신문은 1919년 상해에서 창간되어 독립운동 소식을 전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임시정부 활동을 지원하는 언론 기관이다. - 1919년 2월 - 대한독립선언서
대한독립선언서는 1918년 조소앙이 기초한 독립 선언문으로, 일본과의 병합 무효와 육탄혈전을 통한 독립 쟁취를 주장하며, 기미독립선언보다 먼저 발표되어 연해주 지역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선언했다. - 1919년 2월 - 1919년 독일 대통령 선거
1919년 독일 대통령 선거에서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73.1%의 득표율로 당선되었으며, 투표율은 89.6%였다. - 일본 제국의 학생 운동 - 브나로드 운동
브나로드 운동은 1931년 동아일보사 주도로 시작되어 1938년 중단된 농촌 계몽 운동으로, 김성수, 송진우 등이 주도하고 학생들을 중심으로 농촌에서 문맹 퇴치, 학술 강연, 위생 개선 등의 활동을 펼쳤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 해방 후 농활로 이어졌다. - 일본 제국의 학생 운동 - 6·10 만세 운동
1926년 순종의 장례 행렬을 기점으로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6·10 만세 운동은 민족주의 및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과 연대하여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며 항일 시위를 벌였으나 일제의 강경 진압으로 실패하였지만, 새로운 저항 양식을 보여주며 후속 항일 운동에 큰 영향을 주어 2020년 대한민국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2·8 독립 선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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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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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이름 | 2·8 독립 선언 |
문서 이름 (한자) | 二八獨立宣言 |
문서 이름 (다른 이름) | 조선청년독립선언 |
문서 이름 (원어) | 조선청년독립단 |
선언 날짜 | 1919년 2월 8일 |
목적 | 일본으로부터 한국의 독립을 선언 |
관련 단체 | |
관련 단체 | 조선청년독립단 |
추가 정보 | |
관련 정보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2·8독립선언 검색 |
관련 정보 (영어) | 코리아 헤럴드에서 2월 8일 독립선언 영문 번역본 발견 기사 |
2. 배경
1910년부터 1945년까지 한국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였다.[4][1] 이 시기에 여러 나라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한국 독립을 위해 활동했다.[4][1]
1919년 1월, 전 한국 군주였던 고종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일본에 의해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퍼져 독립 의식을 고조시켰다.[3] 또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14개 조항에서 자결권을 언급하면서 한국 내 독립 열망이 커졌다.[4][1]
2. 1. 국제 정세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전후 처리를 논의하기 위해 파리 강화 회의가 열릴 예정이었다. 이 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제창했다.[5][6]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윤치영은 YMCA 총무였던 미국인 잭 데이비스의 비서 라이언 부인에게서 우드로 윌슨의 파리 강화 회의 참석과 이승만, 정한경, 민찬호 등의 한국 대표 파견 예정 소식을 들었다.[7] 윤치영은 이 소식을 다른 동경 유학생들에게 알렸다.[7] 귀국길에 일본에 들른 여운홍도 동경 유학생들에게 미국 교포들의 독립운동 자금 모금 소식과 국제 정세를 전했다.[7]
1918년 베이징에 있던 이광수는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민족자결주의, 윌슨 강령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조선 독립의 희망을 품었다.[8] 이광수는 서울에서 현상윤, 최린과 독립운동을 논의한 후 동경으로 돌아가 최팔용 등과 함께 독립선언을 결의했다.[8]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강점기 동안, 여러 나라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한국 독립을 위해 활동했다.[4][1]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14개 조항에서 자결권을 언급한 후, 한국 내 독립 열망이 커졌다.[4][1] 1919년 1월에는 고종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일본에 의한 독살설이 퍼져 독립 의식을 더욱 고조시켰다.[3]
2. 2. 국내 상황
1910년부터 1945년까지 한국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였다.[4][1] 이 시기에 여러 나라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한국 독립을 위해 활동했다.[4][1]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세계 평화를 증진하기 위한 그의 14개 조항에 자결권을 포함시킨 후, 제국 내부의 저항이 증가하기 시작했다.[4][1] 1919년 1월에 독립 의식을 고조시킨 또 다른 사건이 발생했다. 전 한국 군주인 고종이 갑자기 사망했는데, 이는 일본에 의해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소문으로 이어졌다.[3]2. 3. 일본 내 유학생들의 동향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윤치영은 윤치호의 친구이자 동경 YMCA 총무였던 미국인 잭 데이비스의 소개로 그의 비서인 라이언 부인에게 영어 회화 개인 지도를 받던 중 '포틴 포인트(fourteen point)'[5], '셀프 디터미네이션(self-determination)'[6]과 같은 생소한 단어부터 시작해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파리 강화회의 참석, 이승만, 정한경, 민찬호의 파리행 예정 기사 등을 듣게 되었다.[7] 그는 사발통문을 통해 동경에 있던 다른 한인 유학생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7]
1918년 11월 23일, 한국으로 귀국하는 길에 일본을 방문한 윤치영의 중앙학교 동창인 여운홍은 동경 한인 유학생들을 만나 미국 교포들의 독립자금 모금과 움직임, 국제 정세에 대한 자세한 소식을 전해주었다.[7]
1918년 와세다대학 철학과 학생이던 이광수는 베이징에 체류 중 제1차 세계대전의 휴전, 민족자결주의, 윌슨 강령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 중국인들은 이 소식을 듣고 파리 강화 회의에서 중국의 완전한 독립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였다. 이광수도 조선 독립의 희망을 품고 파리강화회의에 중국 대표들이 베이징을 떠난 후 서울로 돌아가 현상윤, 최린과 독립운동을 논의하였다. 이광수는 11월 동경으로 돌아가 와세다대학의 최팔용을 만나 결의를 밝혔고, 최팔용은 백관수, 김도연, 서춘, 김철수, 최근우, 김상덕 등의 동지를 얻었다. 이광수는 원문을 쓰고 영문으로 번역했다. 최팔용은 이광수가 상해에 피신할 것을 권유하였고, 이광수는 이 요구를 따라 상하이로 피신하였다.[8]
이 독립선언은 만주 지린에서 발표되었던 무오 독립선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상해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김규식의 지시에 따라 조소앙이 동경에 파견되어 유학생들을 지도하여 이루어졌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한국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였다.[4][1] 이 시기에 여러 나라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한국 독립을 위해 활동했다.[4][1]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세계 평화를 증진하기 위한 14개 조항에 자결권을 포함시킨 후, 제국 내부의 저항이 증가하기 시작했다.[4][1] 1919년 1월에 독립 의식을 고조시킨 또 다른 사건은 전 한국 군주인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는데, 이는 일본에 의해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소문|고종 독살설한국어으로 이어졌다.[3]
3. 2·8 독립 선언의 전개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경,[4] 일본에서 유학 중인 한국 학생 600여 명이 도쿄의 한국 YMCA 강당에 모여 일본으로부터 한국의 독립을 선포했다.[2] 최팔용, 이광수 등 11명의 대표가 선언문에 서명했다.[4] 선언문은 한국어로 작성된 후 영어와 일본어로 번역되어 언론과 외국 대사관에 전달되었다.[2]
이후 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가두 행진을 벌였다. 독립운동의 구체적인 방향을 논의하려는 찰나, 일본 경찰이 들이닥쳐 해산을 명했다. 학생들은 이를 거부하며 일경과 몸싸움을 벌이다 강제 해산되었고, 최팔용 외 약 60명이 검거되었으며, 8명의 학생들이 기소되었다.[4]
3. 1. 선언서 작성 및 발표
동경 YMCA 회관[9]에서 조선 재일 유학생 400~6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최팔용이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선언하고 이광수가 기초한 2·8독립선언서[10]를 백관수가 낭독했다. 장영규, 최팔용, 윤창석, 김철수, 백관수, 서춘, 김도연, 송계백, 윤치영 등이 참여했다.이들은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은 자주민임을 선언"하였고,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며 민족의 궐기를 촉구했다. 독립선언서 낭독 후 학생들은 가두 행진을 벌였고, 최팔용의 사회로 대회 선언과 결의를 가결했다. 독립운동의 구체적인 방향을 논의하려는 찰나, 일본 경찰이 들이닥쳐 해산을 명했다.
참석자들은 이를 거부하며 일경과 몸싸움을 벌이다 강제 해산되었고, 최팔용 외 약 60명이 검거, 8명의 학생들이 기소되었다.[8][11]
3. 2. 일본 경찰의 탄압과 유학생들의 저항
동경 YMCA 회관[9]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가두로 나선 학생들은 최팔용의 사회로 대회 선언과 결의를 열광 속에 가결하고 독립운동의 구체적인 방향을 논의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들이 들어닥쳐 해산을 명하였다.참석자들은 이를 거부하여 큰 소란이 일어났고, 일본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다 강제 해산되었다. 사회자 최팔용 외에 약 60명이 검거되었고, 8명의 학생들이 기소되었다.[8][11] 2월 12일 오전에 50여 명의 조선인 학생들이 청년회관에서 독립운동을 협의하다가 다시 검거되었다. 이들은 불법 출판물 혐의로 9개월 형을 선고받았는데, 내란죄가 적용되지 않은 이유는 일본이 이 사건을 조용히 무마시키려 했기 때문이었다.[12]
이처럼 2월 한 달 내내 조선인 학생들의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상해로 빠져나간 이광수에 의해 조선과 해외에 보도되었으며, 이 사건은 다음 달 3월 1일 서울에서 이루어진 3·1 독립선언의 도화선이 되었다.
3. 3. 선언서의 내용
2·8 독립선언서의 결의문은 다음과 같다.[4]1. 본단은 일ㆍ한 합병이 오족(조선 민족)의 자유의사에 의한 것이 아니고, 오족(조선 민족)의 생존 발전을 위협하고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히는 원인이 된다는 이유로 독립을 주장함. |
2. 본단은 일본 의회 및 정부에 조선 민족 대회를 소집하여 대회의 결의로 오족(조선 민족)의 운명을 결정할 기회를 줄 것을 요구함. |
3. 본단은 만국평화회의와 민족자결주의를 오족(조선 민족)에게 적용하기를 요구함. 이 목적을 전달하기 위하여 일본에 주재한 각국 대사에게 본단의 의사를 각 정부에 전달할 것을 요구하고 동시에 위원 3인을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함. 이 위원은 이미 파견된 오족(조선 민족)의 위원과 일치하여 행동함. |
4. 전 항의 요구가 실패할 시에는 일본에 대하여 영원히 혈전을 선언함. 이로써 발생하는 참화는 오족(조선 민족)이 책임을 지지 아니함. |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경,[4] 일본에서 유학 중인 한국 학생들 600여 명이 도쿄의 YMCA 한국 강당에 모여 일본으로부터 한국의 독립을 선포했다.[2] 최팔용, 이광수 등 11명의 대표가 선언문에 서명했다.[4] 선언문은 한국어로 작성된 후 영어와 일본어로 번역되어 언론과 외국 대사관에 전달되었다.[2]
4. 2·8 독립 선언의 영향 및 의의
2·8 독립 선언은 3·1 운동의 직접적인 전조로 여겨지며, 한국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4][2] 2023년 2월, 한국독립운동사료관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이 2019년 기증한 자료에서 2·8 독립 선언문의 영어 원본 필사본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독립기념관 연구원은 이광수가 이 문서의 저자일 가능성이 높으며, 안창호가 이끄는 대한인국민회에 보냈을 것이라고 밝혔다.[2] 독립기념관은 3·1 운동 104주년 기념 전시회에서 선언문 원본 32점을 전시할 계획이었다.[2]
4. 1. 3·1 운동에 미친 영향
2·8 독립 선언은 3주 후 한국에서 발생한 전국적인 항일 운동인 3·1 운동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으며,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4][2]4. 2. 한국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
2·8 독립 선언은 3주 후 한국에서 발생한 전국적인 항일 운동인 3·1 운동의 직접적인 전조로 여겨지며,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4][2]2023년 2월, 한국독립운동사료관은 해당 선언문의 영어 원본 필사본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 문서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이 2019년 기증한 자료에서 발견되었다. 독립기념관 연구원은 이광수가 이 문서의 저자일 가능성이 높으며, 안창호가 이끄는 대한인국민회에 보냈을 것이라고 밝혔다.[2] 독립기념관은 3·1 운동 104주년 기념 전시회에서 선언문 원본 32점을 전시할 계획이었다.[2]
4. 3. 역사적 의의
2·8 독립 선언은 3주 후 한국에서 발생한 전국적인 항일 운동인 3·1 운동의 직접적인 전조로 여겨지며,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4][2]2023년 2월, 한국독립운동사료관은 2·8 독립 선언의 영어 원본 필사본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 문서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이 2019년 기증한 자료에서 발견되었다. 독립기념관 연구원은 이광수가 이 문서의 저자일 가능성이 높으며, 안창호가 이끄는 대한인국민회에 보냈을 것이라고 밝혔다.[2] 독립기념관은 3·1 운동 104주년 기념 전시회에서 선언문 원본 32점을 전시할 계획이었다.[2]
참조
[1]
웹사이트
2·8독립선언(二八獨立宣言)
https://encykorea.ak[...]
2023-09-28
[2]
웹사이트
[Newsmaker] Handwritten English translation of Feb. 8 Declaration of Independence found after 104 years
https://www.koreaher[...]
2023-09-28
[3]
웹사이트
Remembering the death that started a movement: Emperor Gojong’s controversial passing began a year of change
https://koreajoongan[...]
2023-09-28
[4]
웹사이트
Resistance in Tokyo encouraged the March 1 Movement
https://koreajoongan[...]
2023-09-28
[5]
기타
윌슨의 14개 원칙
[6]
기타
민족자결
[7]
서적
尹致暎의 20世紀 : 東山回顧錄
三星出版社
[8]
서적
일본의 식민지 조선통치 해부
어문학사
2011
[9]
기타
재일본도쿄조선YMCA, 현 재일본한국YMCA
[10]
뉴스
오늘 아침 더 새로운 독립선언문
http://www.donga.com[...]
donga.com
2008-03-04
[11]
뉴스
학생운동의 정신적 추동력 된 2·8독립선언
https://archive.toda[...]
중앙일보
[12]
서적
尹致暎의 20世紀 : 東山回顧錄
三星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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